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여섯 개의 수Just Six Numbers⟫를 다 읽었다. 이 책은 물리와 천문학에 등장하는 ‘여섯개의 수 : $\mathbf{N}$, $\epsilon$, $\Omega$, $\lambda$, $\mathbf{Q}$, $\mathbf{D}$’에 대한 해설서이다1. 나는 서울대 물리학과 김형도 교수님의 강연을 보면서 이 책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2.
예를들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은 1차원의 시간과 3차원의 공간이 더해진 4차원 시공간인가?
이론물리학자 Max Tegmark는 오직 1차원의 시간과 3차원의 공간이 더해진 4차원 시공간만이 지적생명체를 가진 존재를 허락함을 논증한바 있다3. 헌데 ‘1+3차원의 우주가 아니면 지적 생명체인 우리가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은 ‘오답쳐내기’식의 논증이다. 따라서 시작부터 끝까지를 정확한 인과관계를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야심찬 이론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참으로 불만족스러운 설명일 것이다. 하지만 자연과 우주에는 그런 ‘bottom-up’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여섯 개의 수⟫는 그와 같은 사례 6가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여섯 개의 수⟫는 1999년에 출판되었다. 그런데 그 시기는 초신성에 대한 관측을 통해 우주 가속팽창이 처음 밝혀진 시기이며4, 밀도변수 $\Omega$와 우주상수 $\lambda$는 이런 우주 전체에 대한 거시적 관측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면에서 보면 ⟪여섯 개의 수⟫는 최신 연구성과를 포함하지 못한 꽤나 오래된 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섯 개의 수⟫는 분명 책장에 꽂아두고 두고두고 볼만한 명저라 느껴진다. 개인적으론 책 자체가 꽤나 어렵다 느껴졌다. 책 자체가 어려운건지 번역의 문제인건지 아직 명확히 판단되진 않는데, 아마 전자인것 같다. 깊은 이해를 위해선 상당한 수준의 배경지식이 필요해 보였고, 나는 막힐때 마다 멈추는 대신 어차피 다회독을 해야 될 책이라 보면서 나무대신 숲을 보려 노력했다.
⟪시간의 기원⟫에서도 그렇지만, 이 책에서 또한 우주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방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여섯 개의 수⟫의 저자 마틴 리스Martin Rees의 박사학위 지도교수는 스티븐 호킹의 지도교수이기도 했던 데니스 시아마Dennis Sciama이며, 그가 쓴 논문의 총 인용횟수는 무려 10만회가 넘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천문학계의 세계적 권위자는 자신의 지적방황을 여과없이 고백하고 있다 :
이론은 그 지지자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결코 폐기되지 않으며 과학은 “장례식을 치를 때마다” 발전한다고 물리학자 막스 보른Max Born은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너무 냉소적이다.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몇몇 우주론 논쟁들은 이제 해결되었다. 초기의 문제들 중 몇몇은 더 이상 쟁점이 되지 않는다. 우리 대부분은 몇 번씩 마음을 바꾸었다. 나는 확실히 그랬다. 사실 이 책은 나 자신도 예전이라면 놀랍다고 생각했을 설명을 담고 있다. 내가 설명할 관점은 널리 공유되고 있지만 나의 해석에 전적으로 수긍하지 않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여섯 개의 수⟫ 1장 ‘세계를 지배하는 여섯 개의 수’ 中
그렇다면 과연 그가 ‘예전이라면 놀랍다고 생각했을 설명’이란 무엇일까? 마틴 리스는 다중우주Multiverse론의 진지한 옹호자 중 한명이며, ‘여섯개의 수’ 또한 그러한 이론적 틀에서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
이 여섯 개의 수들은 우주라는 요리의 핵심 ‘조미료’이다. 게다가 그 결과는 그 수들의 값에 민감하다. 만약 그 수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조율’되지 않으면, 별도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조율이 그저 맹목적인 우연일까? 아니면 인자한 신의 섭리일까? 나는 어느 쪽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섯 개의 수가 각각 다른 우주들이 무한히 많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은 처음부터 실패작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인류는 오직 ‘올바르게’ 조합된 우주에서만 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므로 인류가 현재 얼마나 귀한 상황에 있는지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우리 우주와 우주 속에서의 위치 그리고 물리 법칙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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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규모는 어떨까? 대폭발 이후 100억년이 지났는데도 그곳에서 나온 빛이 아직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한 영역이 있을까? 분명히 말하면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우리 우주의 범위(우주는 공간적으로 얼마나 크고 시간적으로 언제까지 존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그리고 아마도 먼 미래에 보게 될 모습에 대한 이론적인 경계는 없다. 사실 그것은 우리가 현재 관측할 수 있는 영역보다 그저 수십만 배 정도가 아니라 10의 수십만 제곱 배나 더 클지도 모른다.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 우주는 어쩌면 우리의 현재 지평선 훨씬 너머까지 뻗어 있으며, 무한히 존재하는 개별 우주들로 이루어진 전체의 한 구성원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이러한 ‘다우주Multiverse’ 개념은 순전히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의 우주론을 확장했을 때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 중 하나다. 우리가 현재의 관측 결과를 설명해 주는 우주론을 신뢰한다면 그것을 확장시킨 결론을 믿어 보는 것도 그리 위험한 도박이 아닐 것이다. 다른 우주에서는 물리 법칙과 기하학이 다를 수 있다. 다우주 개념은 여섯 개의 수가 우리 우주 안에서 취하는 특별한 값들이 왜 ‘특별’한지를 깨닫게 해 준다.
⟪여섯 개의 수⟫ 1장 ‘세계를 지배하는 여섯 개의 수’ 中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미세조정문제에 대한 일관된 합의가 없다는 사실이다5. 최근 필자가 유튜브에서 소개한 스티븐 호킹의 ‘무경계 가설’에 의하면, 우주는 그 자체로 양자역학적이며 ‘여섯개의 수’는 양자역학적 불확실성이 품고있던 무한한 가능성 중 하나가 실현된 결과이다.
같은 지도교수 아래서 공부한 마틴 리스와 스티븐 호킹은 이론적으로 첨예한 대립구도를 보이고 있지만, 우리 인류를 바라보는 시각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호킹은 그의 명저 ⟪시간의 역사⟫에서, 인류를 ‘평범한 은하에서 평범한 별을 공전하는 그저그런 행성에서 살고 있는 화학적 찌꺼기에 불과하다 ’고 썼다. 하지만 이후, 호킹은 그것이 잘못된 관점이었음을 깨달았다. 지적관측자의 존재 자체는 결과인 동시에 하나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인류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선 리스 또한 비슷한 견지를 가진다. 그는 원자보다 작은 미시세계에서부터 은하보다 큰 거시세계에 이르기 까지 — 그 모든 범위에 걸친 법칙과 자연상수들의 기막힌 조화가 없다면 ‘1m 세계’에 사는 인간의 존재가 불가능함을 알게되었던 것이다 :
이것은 놀라운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우주의 광대함은 처음에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우주에서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 우주는 필연적으로 광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말은 더 작은 우주가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는 뜻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그 안에 존재 할 수 없었을 거라는 뜻이다. 우주 공간은 터무니없이 크지 않다. 우주의 크기는 우리가 무대에 도착하기 전, 우리 태양계가 형성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장기적인 연쇄 사건의 결과다.
이것은 어쩌면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폭로로 산산히 부서진 고대의 ‘인간 중심적 시각’으로 후퇴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처럼 지나치게 겸손한 태도(이것은 인간도, 지구도, 태양도, 우리 은하도 특별하지 않다는 천문학의 중심 생각으로 ‘평범의 원리’라고 불린다.)를 취할 필요는 없다. 우리 같은 생명체가 진화하려면 특별한 조건들이 필요하므로 우리의 시각은 어떤 의미에서 전형적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우리 우주의 광대함이 놀랍지는 않지만, 그 뚜렷한 특징들에 대한 한층 심오한 설명을 찾아야 한다.
⟪여섯 개의 수⟫ 1장 ‘세계를 지배하는 여섯 개의 수’ 中
내가 ⟪여섯 개의 수⟫의 구체적인 내용 하나하나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선, 앞으로 많이 공부해야 할거다. 하지만 자연과학자들의 지적방황을 보며, 내 마음은 조금씩 바뀌었다.
여타 다른 젊은이들도 흔히 그렇듯, 나 또한 뭔가를 하기 위해서 ‘모든것이 완벽히 준비된 상태’를 기다려 왔다. 하지만 호킹이나 리스와 같은 전설적 인물들의 지적여정 조차 방황으로 가득했고, 특히나 스티븐 와인버그는 후학들에게 수시로 ‘모든걸 알 필요 없다. 그냥 뛰어들라! ’는 조언을 던졌다. 그들을 보며 내 마음도 조금씩 바뀜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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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thbf{N} \sim 10^{36}$ : 전자기력과 중력의 세기 비
- $\epsilon \sim 0.007$ : 수소가 헬륨으로 융합될 때 에너지로 전환되는 비율
- $\Omega \sim 0.007$ (암흑에너지 제외) : 우주의 실제밀도 $\rho$와 임계밀도 $\rho_c$ 사이의 비율
- $\lambda \sim 1.4657 \times 10^{-52} \ m^{-2}$ : 우주상수
- $\mathbf{Q} \sim 10^{-5}$ : 원시 밀도요동의 진폭
- $\mathbf{D} = 3$ : 공간 차원의 수
[^]
- 나는 김형도 교수님 전기역학 수업의 조교를 한적이 있다. 당시엔 내가 여러모로 불안정한 상태여서 조교업무를 그닥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던것 같다. 볼 때마다 죄송한 마음이 든다.[^]
- Tegmark, Max. “On the dimensionality of spacetime.” Classical and Quantum Gravity 14.4 (1997): L69-L75. (arXive link) [^]
- 솔 펄머터Saul Perlmutter, 브라이언 슈밋Brian P. Schmidt, 애덤 리스Adam G. Riess는 그렇게 관측을 통해 우주의 가속팽창을 발견한 공로로 2011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 내가 고등학생일땐 학교 교과서에 상대론과 양자역학이 없었다. 그리고 학교 수업이나 그 어디서도 우주론에 대한 이런 심오한 이야기를 스쳐지나듯이라도 들어본 적이 없다. 과연 학교나 학원선생님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잘 알고 있었던 걸까? 그들 어떤 속깊은 교육적 이유에서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던 걸까? 아님 그냥 몰랐던 걸까? 답은 명백해 보이지만, 너무 씁쓸하기에 여기서 애써 말하진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