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서와 문화

나는 대략 2년전 부터 유튜브에 ‘강의 ASMR’이란 컨텐츠를 만들어 올리고 있다. 마치 대학강의 처럼, 길면 2시간 넘게 판서하며 물리강의를 하는 포멧의 영상이다1. 이전의 나는 그렇게 칠판에다 뭘 적으며 수업하듯 설명한 경험이 거의 없었는데, 강의 ASMR을 만들며 알게된 한가지 사실이 있다 :

선생이 편하면 학생이 불편하고, 선생이 불편하면 학생이 편하다!

판서자세는 학생을 등지고 칠판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자세와 학생을 정면으로 바라본 상태에서 몸을 칠판쪽으로 돌려가며 판서하는 자세 — 크게 보면 이렇게 둘로 나눌 수 있겠다 :

여기서 내가 느낀바는, 기본적으로 칠판을 정면으로 보면서 판서하는게 가장 편하다는거다. 아마, 아무나 붙들고 칠판에 뭘 적어보라고 하면 그렇게 할것 같다. 사람들은 뭔가를 읽을거나 쓸때, 기본적으로 화면을 정면에서 똑바로 본다. 칠판을 정면으로 보는 자세가 딱 그 자세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몇가지 문제가 생긴다. 일단 선생이 학생을 등지고 서있기에, 수시로 눈을 마주칠 수 없다. 선생이 판서 내용을 가리는 형태가 되어, 학생들은 수시로 고개와 몸을 좌우로 흔들어야 할 수도 있다. 소리도 문제인데 — 칠판에다 대고 말하는 꼴이라, 뒷자리 학생들은 선생이 칠판을 마주 볼때마다 소리가 잘 안들릴 수 있다. 그러니까, 칠판을 정면으로 보면 선생만 편하다.

선생이 칠판을 비스듬히 쳐다보면 그런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된다. 하지만 그리하면 선생이 불편하다. 일단 글이 먼곳에서 시작해 점점 더 가까워 지는 형태로 써지는것 자체가 익숙치 않다. 또한 칠판을 비스듬히 바라보면 수평감각이 좀 흐트러지는데,  그 상태에서 수식이나 글을 일자로 똑바로 쓰려면 또 나름의 신경을 더 써야한다. 또한 분필이 칠판에 대해 사선으로 누워있는 형태에선 분필 홀더를 따로 쓰는게 훨씬 편했다. 그렇게 해야 칠판과 손가락 사이에 충분한 거리가 확보되면서 보다 편안하게 쓸 수 있었다. 만약 홀더를 안쓰면 분필 끝부분을 잡아야 그런 거리확보가 가능한데, 그런 상태에선 분필이 더 부러지기 쉽다.

그렇게 ‘선생의 편하면 학생이 불편하고 선생이 불편하면 학생이 편함’을 알게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다른 강의들을 보니, 확연한 차이가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 

강의를 본업으로 하는 학원강사들은 기본적으로 ‘학생이 편한 자세’를 취한다. 아마 수업전체를 그런 자세로 진행함과 동시에 정갈한 판서를 유지하기 위해선 상당한 훈련과 경험이 필요 할걸로 보인다. 반면 연구가 본업인 교수들은 주로 ‘내가 편한 자세’를 취한다. 물론 강사와 교수의 자세가 이분법적으로 나뉘는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본 바에 의하면, 판서자세에 있어선 학원강사와 대학교수는 확연히 분별된다 — 확실히 강의로 돈을 버는 사람들은 본인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학생이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한가지 드는 의문은 이런것이다 : 이런 차이가 문화적 영향을 받을까? — 생각해보면, 나는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에선 ‘학생이 편한자세’를 본적이 없는것 같다 : 

 

이 중 인상적인 한가지는 Eddie Woo라는 수학강사의 사례이다. 그는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직업적으로 수학을 가르치는 사람인데, 그 또한 ‘내가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판서자세와 문화 사이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나름의 이론이 있는것도 아니고 알고있는 사례도 적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겐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 : 나는 누군가가 판서하는걸 볼때마다, 그 사람이 ‘누구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무의식적으로 관찰한다. ■

  1. 진지한 만든 강의이기도 하지만 진지하게 만든 숙면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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