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는 천문대인가?

‘첨성대는 천문대인가?’ … 여지껏 나는 이것이 타당한 질문이 될 수 있는지조차 의심해본적 없다. ‘첨성대는 신라시대에 천체관측을 목적으로 세워진 건축물이다’ — 나는 기억도 못할 어릴적부터 이것을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로 교육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여러 관련자료들을 접하면서, 그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이 생겼다.

2011년 4월 7일 한국천문연구원 홈페이지에는 ‘첨성대는 천문대였다’는 제목의 보도자료가 게시되었다. 한국천문연구원 김봉규 박사가 여러 고문헌을 분석한 결과 신라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결정적 증거’를 찾았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중보문헌비고>에는 7세기 중반부터 약 100년에 걸쳐 유성관측에 대한 다섯건의 기록이 있는데, 그 기록이 가리키는 장소가 모두 첨성대를 중심으로 1km 반경 내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그런 정황자체가 그 모든 관측이 첨성대에서 이루어졌다는 결정적인 증거라는 것이다.

한반도 최고最古역사서인 <삼국사기>가 신라멸명 후 고려시대에 집필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100년 동안 다섯건의 유성관측 기록’이라는 것이 그렇게 드물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과연 그것을 ‘결정적 증거’라 할 수 있는가? 위 설명과 제시된 문헌에 따르면, 유성에 대한 ‘관측기록’은 있지만 ‘관측장소’는 없다 — 그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위 자료에서는 첨성대 건축이후 유성 뿐 아니라 별자리나 행성에 관한 기록이 양적/질적으로 급증하였다는 것을 또 하나의 근거로 들고있는데, 제시된 기록들을 보면 역시나 관측방법이나 장소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 모든 관측과 기록이 첨성대에서 장기간 체계적으로 이어졌다면, 왜 직접적인 관측장소와 방법이 남아있지 않는 것인가?1

나는 김봉규 박사가 제시한 고문헌기록들은 분명 ‘간접적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첨성대가 애초에 천체관측을 목적으로 지어졌다거나 그것으로 장기간 체계적으로 천체를 관측했다는 주장에 대해선 큰 의문이 드는데, 그 이유는 첨성대의 구조자체가 천체관측의 목적을 분명히 담고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첨성대는 평지위에 세워진 9m가 조금 넘는 건축물이다. 가로등 하나 없는 7세기 중엽의 밤은 굳이 높은곳에 오르지 않아도 천체관측을 위한 훌륭한 조건이었을것이다. 따라서 고문헌에 기록되었다는 행성이 달뒤로 숨었다거나 유성이 떨어졌다거나 하는 사건은 9m 높이에서보나 평지에서보나 별차이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첨성대는 그 구조자체가 천문관측의 목적을 분형히 담고있지 못하다. 첨성대에 난 창은 정남正南 방향이 아니라 동쪽으로 약간 틀어져있는데, 그 방향엔 임금이 사는 궁궐인 반월성이 있다. 이것은, 애초에 그것이 천체관측목적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종교적 목적있음을 나타내는 구조라 보는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또 첨성대 상단에는 긴돌을 우물모양으로 쌓은 정자석井字石 이 있는데, 그 중 한쪽 모서리방향은 정동正東쪽 기준 남쪽으로 약 32도 틀어진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방향은 동짓날의 일출방향과 일치한다’며 이것이 애초에 천문관측을 위한 의도적 설정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첨성대의 위도35.83472°와 경도129.21917°를 기준으로 보면, 동짓날 일출방향은 동쪽기준 남쪽으로 23.6도 지점이다. 만약 주변지형에 의해 관측되는 일몰위치가 변한다면 실제 첨성대에서 관측한 동짓날 일출방향을 근거로 제시해야 할텐데, 그들의 설명은 그런 실측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은듯 하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하더라도, 그것은 ‘왜 하필이면 굳이 창의 방향도 아니고, 정자석의 한쪽면도 아니고, 궂이 한쪽 모서리를 그런식으로 위치시켰가?’, ‘그런 방향설정은 천체관측에 있어 어떤 목적과 의미를 지니는가?’라는 또다른 의문을 낳게된다. 이처럼, 첨성대의 구조는 천체관측목적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결정적 증거’를 담고있는 다른 유물들엔 어떤것들이 있는가?

독일 유적지인 ‘Goseck Circle’은 그 구조가 천체현상을 직접적으로 담고있다. 4,900년전에 형성된것으로 추정되는 Goseck Circle은 약 75m에 걸쳐 그려진 두개의 동심원이다. 여기엔 남북을 잇는 방향을 축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3개의 문이 대칭적으로 나있다. 중간의 문 2개에 대해서는 그 의미가 불분명해 보이지만, 나머지 4개는 각각 하짓날과 동짓날의 일출/일몰 방향과 일치한다. 즉 이 유적은, 다른 문자기록이 없어도 그 구조자체가 ‘동/하지의 일출/일몰’이라는 천체현상을 명백히 담고 있다. 그것의 구조자체가 ‘결정적 증거’인 것이다.

미국 뉴멕시코주 ‘차코 문화 국립역사공원’ 내에 있는 ‘Sun Dagger site’는 훨씬 더 섬세하게 디자인된 유물이다. 약 1,000년전 차코 인디언들에 의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적은 반듯하게 수직으로 세워진 세개의 석판과 그 뒤 벽면에 그려진 나선형의 문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날이면 돌판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태양이 소용돌이를 반으로 갈라놓고, 동짓날이면 햇살이 두갈래로 쪼개져서 소용돌이 양쪽 가장자리에 하나씩 떨어진다고 한다. 이 또한 그 구조자체가 천체현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이 명백해 보인다.

그렇다면 첨성대의 건립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이 천체관측용도로 쓰였다는 명백한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그것의 구조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필자는 첨성대관련 자료를 검색하던 중 2001년 KBS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선덕여왕의 비밀코드, 첨성대>를 보았는데, 이 영상 후반부에 나오는 근거들은 명백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신화에는 우물이 등장한다. 양산기슭2에 있는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흰말이 울고 갔는데 그 자리에 알이 있었고, 그 알에서 탄생한 것이 박혁거세라는 것이다. 그만큼 신라인들은 우물을 신성시 여겼다고 하는데, 첨성대를 상단 또는 내부에서 보면 그 모양은 영락없는 우물이다. ‘첨성대는 선덕여왕이 신성한 우물을 통해 하늘로 가 닿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탑’ — 이것이 다큐멘터리 제목에서 말하는 ‘선덕여왕의 비밀코드’인 것이다.

첨성대는 신라인에 대한 많은 것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그것이 지질학적으로 불안정한 지역에서 1,400년 동안 원형그대로 서있었다는 사실은 신라인들이 상당한 수준의 건축기술을 보유하고 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고, 그 형태는 그들의 문화와 사상을 드러낸다. 또한 시대가 변해도 빛바래지 않는 미적가치는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가르치는지에 관해선 깊이 반성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관리하는 ‘우리역사넷’이라는 사이트에서는 첨성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경주에 있는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다. 농사짓기를 위하여서나 별자리를 정확하게 알아 내고 달력을 만드는 데는 천문학이 있어야 했다. 여기서 산수나 과학이 발달하여 둑을 쌓고 큰 건물을 짓는 데 이용되었다. 옛날의 무덤이나 탑을 보면 매우 발달한 기술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간접적 증거들이 있는것은 분명해 보이나, 첨성대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쟁이 있다. 헌데 이러한 사실에 대한 고민과 질문없이, 위 기술처럼 어떤 하나의 해석을 정해진 사실로 받아들이고 가르친다면 그런 교육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

  1. 조선시대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첨성대는 선덕여왕 때에 돌을 다듬어 샇았는데, 그 속은 틔여서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한다.’고 기록되어있다 한다. 하지만 이는 첨성대 건축이후 800년도 더 뒤에 작성된 기록이다. 그것이 ‘누구나 인정 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가 되려면 첨성대의 구조자체가 ‘천체관측’이라는 목적을 명백히 담고있거나, 또는 그와 관련한 육하원칙에 맞는 명확한 기록이 남아있어야 할 것이다.[^]
  2. 부산옆에 있는 양산이 아니라, 경주에 있는 산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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